• 공회주 세르시온
  • 2019. 3. 10. 14:12
  • 키워드: 사랑할 자격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나날을 되찾은 제국과 제국민들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전후복구와 권력교체 외에 가장 뜨거운 화두에 오른 것은 프라시더스 공작의 혼사였다. 선택의 날 이후 성검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공작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제국에서 일등 신랑감으로 등극했다. 공작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명망 있는 귀족이, 그것도 한 가문의 주인이 그 나이까지 옆자리를 비우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프라시더스 공작가가 혼인을 서두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를 노리고 내로라하는 고귀한 영애들의 보이지 않는 싸움도 치열했다. 그러다 대륙이 악마숭배자들로 인해 전란에 휩싸이자, 자연스레 공작의 혼사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평화로워진 지금,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 생각은 제국의 황태자인 휴마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때, 마음에 드는 영애가 있으면 내가 힘써서 만남을 주선해줄 테니.”

     

    말만 해보라는 뜻이었다. 다 같은 선자리라고 해도 누가 주선했느냐에 따라 성사 여부가 크게 달라졌다. 일례로 일개 남작과 백작 영애가 신분차로 이루어지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영애가 직접 황제에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청해서 극적으로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그만큼 황제를 비롯한 황가 일원의 주선은 큰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니 만큼 황가 사람들은 쉽게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는데, 이는 반대로 주선해준 상대가 황가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라는 뜻으로도 통했다. 그러니 황태자가 공작의 선자리를 봐주면 그 상대와의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터였다. 누구라도 귀가 솔깃하고 펄쩍 뛰며 좋아할 제안이었다. 그런데...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전후복구도 완벽히 되지 않았고, 새로 시작한 사업도 자리를 잡으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저 자신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작 당사자의 반응이 이렇게 시원찮아서야. 휴마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앉아만 있어도 빛이 나는 저 고아한 자태를 보라. 소리 하나 없이 찻잔을 들어 올리는 우아한 몸놀림은 또 어떻고? 외모뿐만이 아니다. 능력 출중하지, 성품이야 두 번 말하면 입 아프고. 본인이 혼인 의사만 내비치면 고귀한 집 여식들이 체면 다 버리고 당장 줄을 설 터인데. 왜 이렇게 고지식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후복구야 너 아니라도 할 사람 많잖아? 일손 부족하다고 평민 기용하자고 파격제안한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사업이야 잠깐 한두 달 보좌관한테 맡기면 되는 거고... 마음의 준비는 또 뭐냐? 너 그러다 평생 혼자서 늙어 죽는다.”

     

    황태자가 답답해서 가슴을 탕탕 치는데도 공작은 태연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하도 한창 바쁘실 터인데 애꿎은 데 신경 빼앗기지 마시고 이만 돌아가 보심이 어떠십니까.”

    나 정말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세르펜스. 공작가의 미래를 생각해봐.”

    이때까지 전하가 생각 안 해주셔도 저 혼자 잘 꾸려 나갔습니다. 아니면 제가 그리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미덥지 못한 거랑은 달라. 친구로서 걱정이 돼서 그러지, 걱정이.”

    괜한 염려는 접어두십시오.”

     

    그야말로 철옹성. 말이 안 통하기가 깐깐한 귀족 영감들 못지않았다. 예전에도 꼬장꼬장한 면이 있긴 했지만, 요즘은 대놓고 까칠하게 구는 친구였다. 처음엔 이런 변화에 얼마나 놀랐던가. 황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했더니,

     

    앞으로는 세피라고 부르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친근하게 구시려거든 차라리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라며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말했더랬지. 너무 당황해서 그 날로 시온 경을 불러서 내 친구가 변했다고 하소연했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러니까, 진정한 친구라면 자기가 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좌관의 말에 휴마누스는 많은 생각을 했더랬다. 친구의 불우한 가정사를, 그 때문에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세르펜스의 감정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보좌관도 알아챘던 사실을, 어릴 적부터 얼굴을 마주했던 그는 왜 몰랐던 걸까?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어떻게 리벨론 경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까, 왜 세르펜스는 자신에겐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시샘과 원망의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부정적인 감정에 오래 붙잡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세르펜스가 지금이라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자 했다면, 휴마누스 또한 과거에 자신이 못해준 것보단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낸 결론이 이것이었다.

     

    세르펜스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자!

     

    행복하지 않은 아이였던 것이 트라우마라면, 자신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냄으로써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현숙한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을 보노라면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는 금방 걷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요컨대, 휴마누스는 자신의 친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뒤늦은 도움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이 시큰둥한 반응이라니. 심지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슬슬 일어날 낌새마저 보이고 있다. 할 수 없지. 이럴 줄 알고 휴마누스는 2차전을 계획했다.

     

    그래, 그럼. 그건 그렇고, 점심은 먹고 갈 거지?”

    아니요.”

    ? ! 너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할 말도 없나?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라도 나누고 가면 좋잖아. 매정하기는.”

    애초에 전하께서 자문회가 마치고 바로 돌아가려는 저를 잠시면 된다고 막무가내로 이리로 끌고 온 것이지 않습니까.”

     

    세르펜스의 예의 바른 대꾸가 어이없다는 듯 들리는 건 왜일까. 휴마누스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어찌되었든... 모처럼만에 시간이 난건데 점심이나 들고 가. 피차 바빠서 얼굴도 자주 못 보잖나.”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누구랑?”

    사적인 약속입니다.”

    여자? 아니,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설마 시온 경은 아니겠지?”

    “...”

     

    세르펜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곤란함 반, 성가심 반이 골고루 섞인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진짜인거냐. 휴마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너무 네 보좌관을 끼고 사는 거 아니냐?”

    왜 지금 그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들어봐. 가끔 보면 걔 때문에 네가 결혼 안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물론 네가 시온 경을 친구처럼 아끼는 거 알아. 지금은 시온 경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 근데 언젠가 경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너한테 소홀해지지 않겠어? 그때 가서는 너무 늦는다. 그러니까 너도 이참에 결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말할 요량이었는데. 휴마누스는 돌연 손끝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성검을 붙잡았다.

     

    숨 막히는 정적, 그리고.

     

    “...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비록 찰나였지만, 휴마누스는 분명히 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얼떨떨한 상태에서 벗어나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문 너머로 사라져가는 세르펜스의 등만을 겨우 좇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뭔가 실수한 건가...”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휴마누스가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알고 있다. 이것은 합당하지 않은 분노다. 의도하지 않은 말에 저 혼자 정곡을 찔려놓고선 멋대로 화내고 돌아서는 것은 옳지 않았다. 옳지 않다. 그럼에도, 알고 있지만. 세르펜스는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황궁 복도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동안 아는 척을 하려다가 세르펜스의 흉흉한 기세에 찍소리 못하고 물러서는 일이 몇 번째 반복되었다.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은 황궁의 외진 정원에 다다라서야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걷다보니 화는 점차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 대신 들어찬 것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었다.

     

    시온 리벨론이 그의 보좌관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시온의 중심은 세르펜스였다. 그들은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시온은 그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친우였다. 그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마다 불안을 잠재워주었고 결핍을 채워주었다. 사소하게는 그가 식사를 거르진 않는지 챙기고 좋아하거나 좋아할만한 간식을 준비하고 반응을 살피는 등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를 위해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세르펜스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움직이고, 관심을 쏟는다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다.

     

    그가, 시온이 세르펜스를 버릴 리 없다.

     

    이것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얄팍한 믿음인지는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중한 이를 늘린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이를 버린다는 의미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시온이 그를 배신했다고 여길 것이다.

     

    세르펜스에게 시온은 유일했으니. 시온에게도 유일은 세르펜스여야만 했다. 그것이 공평했다.

     

    추악한 독점욕. 구역질나는 이기심. 세르펜스는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절대선으로 자신을 일컫는 세간의 위명이, 조금쯤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던 시온의 애정 어린 허락이 지금만큼 무거울 수 없었다. 대체 누가 선하고,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세르펜스, 그는 시온을 사랑할 자격마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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